서울 여자 독립기 ⑬ : 자가 매수, 그 후로 2년 - PUNPUN

서울 여자 독립기 ⑬ : 자가 매수, 그 후로 2년

결국 이 한 마디가 남았다. 도전하고, 공부하고, 아껴라

오늘 일기 3줄 요약
👆 2년을 살았고, 그사이 주택정책은 또 몇 번의 격변을 맞이했다. ✌ 지하철로 도보 이동이 가능한 한강변의 아파트 중, 가장 저렴한 우리 집은 2년 만에 시세가 2억 넘게 올랐다. 👌 실거주 한 채는 생명줄이니, 그냥 삽시다.

치밀한 준비로 끝마친 이사

이사 들어가는 날은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다. 관리사무소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은 부동산 부장님이 해결해줬고, 우리는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은행에서 나온 법무사와 금액을 정리했다. 포장 이사였지만 각종 가전제품 반입이 겹쳐 땀을 뻘뻘 흘리며 동분서주했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나가자마자 대충 씻고 주민센터에서 주소 이전을 마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마음의 진정한 평화는 다음날 에어컨 설치가 끝난 직후였지만 말이다.

2014년 12월에 월세로 독립해 2017년 2월, 전세로 갈아탔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 결혼했고, 드디어 2018년 7월, 자가 아파트에 입성했다. 4년 만에 맞이한 격변의 현장이었다. 남들은 10년이 걸쳐야 겪을 변화를 나는 단 4년 만에 맞이했다.

“이달 안에 계약하고 상반기 안에 이사 갈 거야”

이 말은 신랑에게만 한 말이 아니었다. 혹시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계약금이건 중도금이건 현금조달이 바로 가능한 건 결국 부모님 찬스였을 터라 양가에 똑같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신랑에게 말을 꺼내고 2주, 부모님들께 이야기한 지 1주일 만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셈이었다. 실거주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친정 식구들과 시어머니는 잘했다 하셨지만, 보수적인 시아버지는 그 큰 빚을 어찌 해결할 것인지 물으셨다. 그러실까 싶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말씀드린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결혼한 지 1년 남짓 된 며느리의 3억 원짜리 배포였던 것이다.

불안해하실 것은 알았다. 나도 신랑도 여전히 그리 많지 않은 수입을 버는 문화예술계 종사자였으니까. 그나마 나라도 정기적인 수입이 확보되어 내린 결정이었다. 철없다 소리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A4용지 한 장에 자금계획을 적어서 내밀었다. 예상하는 대출 이자와 한 달에 갚아야 하는 돈, 우리가 현재 보유한 자금 상황.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시아버지는 집값이 내려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하셨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안 떨어지게 할게요”

3억 2천만 원짜리 배포는 이런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어 하셨다. 아마 ‘네가 무슨 재주로?’라고 묻고 싶으셨을 것이다. 너무나도 뻔뻔하게 구는 며느리에게 보탤 말은 없었다. 이런저런 정기적인 비용을 다 제하면 회사에서 사 먹는 점심을 포함한 용돈이 30만 원이었다. 우리 부부의 자금 배분은 명확했다. 공동으로 사용한 소비와 제습기, 이불, 커튼 같은 아이템들은 내가, 그리고 식비, 외식 등 기타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랑이 지출했다. 대출은 나의 몫이었다.

배짱 좋게 말했지만 사실 무서웠다. 아이라도 생기면, 그래서 휴직이라도 하면 답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진짜로 집의 가치가 올라서 집값이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 지난 1년 간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내 월급이 오른다면 집값도 오르기 마련이다

어렸을 적에, 집에서 큰 사기를 당해 당시 엄마가 장만했던 작은 집이 홀랑 날아갔다. 뒤늦게 그때의 부채 규모를 듣고 내가 한 첫 마디는 “겨우 2천?”이었다. 1989년의 2천만 원. 그 당시에는 은마아파트도 2천만 원이었다. 30년 전 2천만 원은 오늘의 20억 원이다. 초등학교 때는 300원짜리 과자가 제일 비싼 거였는데, 지금은 2천 원은 줘야 그만한 과자를 산다.

내가 사는 집과 지하철에서 도보 1분 거리의 집과의 차이는, 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5년 전 집값과 오늘 날의 집값 차이는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2003년 처음 그 아파트에 온 가족이 이사할 때, 집값은 1억원 남짓이었다. 그러다 2014년 엄마가 집을 비울 무렵엔 3억 원이 좀 넘었고, 내가 다시 들어갔을 시점에 집은 5억 1천만 원의 시세를 형성했다. 그리고 지금은? 무려 7억 5천만 원을 기록 중이다. 물론 1층인 우리 집도 ‘KB시세’ 기준으로 6억 9천만 원을 찍었다. 2년 만에 2억 2천만 원이 오른 셈이다. 시세보다 비싸게 산 집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일을 하면 월급은 어떤 식으로든 오른다. 지금의 1억 원은 매우 큰돈 같지만, 회사생활을 하는 7년 사이에 나의 페이는 꽤 많이 변했다. 물가가 오르면 임금도 따라 오른다. 그리고 급여가 상승 폭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더라도, 집은 인플레이션을 이미 반영해 같이 치솟는다.

그 사이 변수가 많았다. 주택정책은 계속 바뀌었다. 엄밀하게는 다주택자들을 자극하는 정책이 쏟아졌다. 반기에 한 번씩 튀어나오는 정책 때문에 부동산 경기는 불타올랐다. 2017년 8월에 대출을 통제하기 시작한 이후, 2018년 여름에 다시 한번 임대주택을 보유자를 규제하는 정책이 나왔다. 이로 인해 2018년 8월엔 지방에서 서울로 몰려와 집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무주택자도 주택 구매에 나섰다. 이처럼 공급은 한정적인데 수요가 늘어나니 집값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예를 들어 2018년 3월 기준으로 6~7억 원을 호가하던 마포의 아파트들은 이제 10~12억 원을 찍고 있다. 염창동 역세권의 15년 된 아파트도 30평대는 9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신축은 입주 전부터 10억 원을 찍은 상태이고.

놀라운 변화에도 우리는 평온했다. 왜? 이미 집을 샀으니까. 다른 집으로 갈아타기에 이제 힘든 구조로 변화했지만, 당장은 안정적이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을 때 아파트 시세를 검색했다.

이자를 어떻게 갚아나갈 것인지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금리는 계속 떨어졌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를 적용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하락하는 것을 보며 속상했다. 30년에 걸쳐 이자를 갚아나가야 하니 금리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 2020년 5월, 우리 집의 시세가 6억 원으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3억 원이 채 안 되는 빚이 남아있었는데, 시세가 6억 원이란 말은 보금자리론의 최대 대출 가능 금액인 3억 원을 낮은 금리로 대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단 1원이라도 시세가 오르면 일반은행에서만 대출을 갈아탈 수 있었다. 당장 서류를 갖춰 제출했고, 다행히 대출받은 이력이 있어 그런지 3일 만에 승인이 떨어졌다. 그리고 한 주 뒤 곧바로 시세가 6억 1500만 원으로 변했다. 잠시 망설였다면, 대출 갈아타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난해 가을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서 작은 평수라도 조금 더 지하철 가까이로 이사할 걸하는 아쉬움이 많이 없어졌다. 금리 낮추기에 성공했고, 대출금 자체가 3억 원 미만으로 떨어지니 한 달에 내야 하는 이자도 평소보다 20만 원가량 낮아졌다. 그러자 심리적 안정감이 훅 차올랐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대출을 상환하는 방식은 크게 체감식 (원금균등)분할상환, 원리금균등분할상환, 체증식분할상환)가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체감식분할상환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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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2억 원을 상환할 때 체감식 분할상환과 원리금 균등분할상환, 그리고 체증식 분할상환을 비교한 것이다. 체감식을 선택하면 초반 부담은 크지만 이자가 제일 적고, 체증식은 초반 부담은 적지만 내야 하는 돈이 점차 늘어난다. 우리는 원금을 360개월간 균등분할하는 ‘체감식 원금균등분할’방식의 대출을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금리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언젠가 이 집을 팔고 나간다는 전제를 깔면, 초반에 이자를 많이 내는 ‘체감식 원금균등분할’ 방식은 부담이 크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고 휴직에 들어가니, 원금을 많이 상환하는 방식이 매우 부담 되는 것.

더군다나 직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집값은 인플레이션의 산물이라고. 지금의 10만 원은 10년 후의 10만 원보다 훨씬 가치가 크다. 그러니 더 큰 가치를 지닌 돈을 대출상환에 사용하는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재테크에 밝은 사람들은 체감식보다 체증식을 선택한다. 어차피 언젠가 팔고 나갈 집, 이자만 내고 살다 끝내겠다는 전략이다.

고지식하고 미련한 나는 전세자금대출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빚을 빨리 갚아 완전히 내 집으로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언젠가 집을 팔아 그것으로 빚을 갚아야 하면, 결국 사라질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직도 재테크와 거리가 먼 인간이란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육아휴직 중인 지금, 당장 한 달에 100만 원 넘는 돈을 갚아나가는 게 참 힘든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미련한 선택을 했다. 사실 살짝, 아니 좀 많이 후회 중이다. 돈을 갚는 대신 종잣돈으로 뭉쳐 또 다른 투자를 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당장의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어차피 복직하고 일을 시작하면 생각 못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또 그렇게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2년만에 갱신한 360개월 할부를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며 살고 있다. 요즘 같은 상황에는 어디 이사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예전 같으면 갭투자로 좋은 동네의 집을 사고 월세로 옮겨 전세보증금을 뺀 다음, 다른 곳에 투자하는 부동산 투자의 정석 같은 루트가 다 막혀버린 탓도 있다. 자포자기의 상태라고 할까? 그냥 이곳에서 당분간 세 가족이 그저 살아가면 그만인 그런.

수많은 정부 정책의 등장으로 우리 아파트의 전세 시세는 아파트를 처음 산 가격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으로 책정됐다. 돌이켜 보면 하마터면 매매는 고사하고 전세도 못 들어올 뻔했다. 그러니 거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말이다.

내 집 마련의 시작은 종잣돈 마련부터

혼자 사는 수많은 여자 후배들에게 말한다. 우선 1억 원을 모으라고. 1억 원이 남의 이야기 같다는 말에 홈택스에 들어가 그간의 모든 소득을 합해보라고 말한다. 최저 시급을 받았더라도 5년만 사회생활을 꾸준히 했다면 이미 1억 원이 스쳐 지나갔음을 알게 될 거라고. 내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짜리 집에서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열심히 갚아 나간 전세자금대출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목돈을 만들어라. 서울이 아니어도 안전한 주거공간을 위한 도전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1억 원. 어려워 보여도 한번 올라타면 그 다음은 움직이는 돈의 단위가 다를 것이다.

3년 전 그 말을 새겨들은 후배 하나는 올해 안에 1억 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단다. 지금은 뭘 할지 모르겠다는 말에 일단 서울이든 경기도이든 살만한(buy) 동네, 살고 싶은(live) 동네를 뒤지며 시세를 확인하고 후보 지역을 정하라고 했다. 집값은, 특히 아파트 가격은 빅데이터의 산물이다. 남향인지, 혹은 1층인지, 10층인지, 지하철에서 얼마나 먼지, 분리수거장과 얼마나 가까운지, 주차장에서 이동은 어떠한지 등 다양한 변수가 예민하게 반영된 아주 섬세한 수치이다. 하물며 입지에 따라 얼마나 천차만별인가. 생각보다 서울은 넓고, 경기도까지 하면 더욱 넓다. 기회는 어딘가에 있다. 꾸준한 발품과 오랜 노력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진다.

혼자 살수록 주거 안정은 중요하다. 자가 주택 매수는 남일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해낼 수 있다. 도전하고, 공부하고, 아껴라. 그게 혼자 사는 후배들에게 매번 하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진심을 다해 권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돈’과는 거리가 먼 예술계에서 머물다 뒤늦게 ‘재테크’에 눈을 떴다. 푼푼에서 ‘서른에 시작한 주식 오답노트’를 연재하며 수많은 재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해외 주식 매수법’을 공개 했던 그가 재린이를 위한 부동산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다. 내 집 마련하고 싶은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서울 여자 독립기’는 매주 수요일 푼푼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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